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나 무스쿠리 (문단 편집) == 활동 == 1959년 그리스 음악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, 곧 '지중해 음악제'에서도 대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. 나나 무스쿠리의 명성은 1960년대부터 그리스를 넘어 유럽 여러 나라들과 미국까지 널리 퍼졌다. 1962년 [[퀸시 존스]]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음반을 냈고, 1964년에 [[카네기 홀]]에서 공연을 가지며 수많은 팬들이 생겼다. 1960년대 후반, 그리스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, 20년 가까이 해외에서 거주했는데, 60년대 후반 발표한 음반들이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히트를 쳐 1971년에는 당해 최고의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다. 20년간 그리스를 떠나 있었으나 1984년 그리스로 귀국한 후 1994년부터 1999년까지 [[신민주주의당|신민주당]] 소속으로 [[유럽의회]] 의원직을 재임하기도 했다. 1958년에 데뷔한 후 2008년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50년간 4억장에 가까운 음반을 판매한 기록을 세웠다. 다만 2011년부터는 예전까지는 아니더라도 투어를 재개한 상태다. [[유로비전 송 콘테스트]]에도 참가했는데 1963년 대회에 뜬금없이 [[룩셈부르크]] 대표로 나왔다. ~~같은 그리스인인 비키 레안드로스도 1968년에 똑같은 나라로 출전한다~~ 한국에서도 7080세대를 중심으로 잘 알려진 가수이기 때문에 한국인 팬들도 많으며, [[패티김]], [[송창식]] 등이 무스쿠리의 노래를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. 한 때 12~13세 연하의 한국인 남성과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으나,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확인된 사실은 없다. [[1988년]] 88 MBC 서울국제가요제 공연을 위해 내한, [[2005년]]에도 내한 공연을 가졌고 [[2008년]] 은퇴를 선언한 후 은퇴 투어 공연중에도 한국을 방문해 고별 공연을 가졌다.[* 2008년 공연 때는 공연장 측의 미숙한 진행으로 평이 좋지 않았다.] [[태안 기름 유출 사고]]때 피해를 입은 어민들을 위해 공연 수익 1만 달러를 기부했다. 은퇴 선언 후 성사된 내한 공연 당시 측근의 설명에 따르면, 나나 무스쿠리가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한다. 한국에서 자신의 노래가 인기를 끈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, 노래에 반영된 정서가 한국민의 그것과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답변을 하였다. 2010년에는 [[그리스 경제위기]]로 어려움에 처한 조국을 위해 [[http://www.chosun.com/site/data/html_dir/2010/03/04/2010030400634.html|연금을 반납]]하기로 결정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